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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의료재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임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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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의료재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베를린 신경재활병원 '판 첸트룸'을 다녀오고

뇌졸중 같은 중증 뇌질환은 후천적 장애의 주요 원인이다. 응급치료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재활도 반드시 필요한 질병이다. 보통 중증 뇌질환이 발병하면 종합병원에서 응급치료 후 재활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게 되는데, 재활 후에도 잔존 장애로 인해 일상생활 복귀가 힘든 사람이 많다. 독일의 경우 중증 뇌질환 환자 중 약 30퍼센트가 재활 후 자립생활에 어려움이 크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독일은 바로 이 30퍼센트의 환자들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하고 있을까? 대표적인 예로 베를린에 소재한 어느 재활기관을 소개하고자 한다.   

판 첸트룸을 다녀오다

필자는 이달 독일을 방문한 남북장애인치료지원협의체(대표 김재균)의 초청으로 9월 7일 판 첸트룸(P.A.N. Zentrum)을 함께 방문했다. 판 첸트룸은 Post-Akute Neurorehabilitation Zentrum의 줄임말로 '포스트 급성기 신경재활 전문병원'을 뜻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급성기 재활 이후 단계인 회복기 재활을 담당하는 신경전문병원이다. 쉽게 말해 '재활 후 재활'을 제공하는 병원이다.

 판 첸트룸 전경. ⓒP.A.N. Zentrum  판 첸트룸 전경. ⓒP.A.N. Zentrum

판 첸트룸의 재활 목표 및 대상

판 첸트룸의 재활 목표는 환자의 잠재기능을 적극 촉진시켜 환자가 심신의 건강을 회복하고,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에 성공적으로 복귀 및 참여하도록 도모하는 데에 있다.

판 첸트룸은 병이나 사고로 인해 뇌졸중, 외상성뇌손상 같은 중증 뇌질환 발병 후 신경재활치료를 받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립생활이 어려운 환자를 대상으로 한다. 판 첸트룸은 총 66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데, 구체적인 선정기준으로는 근로가능연령대인 18세부터 60세 사이이고, 재활 예후가 좋고, 재활 의지가 강하며, 단체생활을 잘할 수 있는 환자이다. 인공호흡기나 기관절개관에 의존하는 환자들도 집중 재활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18세 미만 아동·청소년, 악성질환·중증정신질환·중독 환자는 선정대상에서 제외된다.

판 첸트룸의 건축 특징

판 첸트룸 본관에 들어서면 독특한 건축구조가 눈 앞에 펼쳐진다. 왼쪽에는 휴게공간, 오른쪽에는 카페가 있고, 앞으로 조금 걸으면 재활운동실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휴게공간과 카페 그리고 재활운동실이 모두 벽 없이 하나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환자들이 재활운동을 하며 서로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재활 의지를 북돋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재활운동공간을 단순히 운동만 실시하는 폐쇄형 공간이 아니라, 타인과 적극 소통하며 상호작용할 수 있는 개방형 공간으로 탄생시킴으로써 환자의 재활 의지와 재활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병원 관계자의 설명이다.

실제로 판 첸트룸 환자의 약 70퍼센트가 재활 후 자신의 집으로 복귀하여 자립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자택으로 복귀하지 못하는 사람은 요양시설이나 장애인거주시설 등 전문기관으로 연결되어 집중 케어를 받는다.

개방형 재활운동실에 서 있는 환자들. ⓒP.A.N. Zentrum 개방형 재활운동실에 서 있는 환자들. ⓒP.A.N. Zentrum

재활운동실에 구비된 최신 독일·스위스산 재활장비도 인상적이지만, 필자의 시선을 더욱 끄는 부분은 환자들이 자연채광이 환하게 쏟아지는 지붕 아래에서, 통창 밖의 초록빛 자연 경관을 즐기며 재활운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병원이 강조하는 환자의 높은 재활의지, 높은 재활성공률이 바로 이러한 운동 조건에서도 기인하지 않을까 싶다.

판 첸트룸이 보유한 최신 재활운동기구들 ⓒP.A.N. Zentrum 판 첸트룸이 보유한 최신 재활운동기구들 ⓒP.A.N. Zentrum

판 첸트룸의 재활 콘셉트

판 첸트룸의 재활 기간은 18개월이다. 신경재활의학과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언어치료사, 심리상담가, 간병사, 사회복지사 등으로 구성된 다학제 재활팀이 환자의 개별 요구와 재활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환자와 함께 노력한다.

나아가 환자의 집 구조를 파악해 턱을 없애거나, 필요한 보조기기를 마련하거나, 환자가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스트레스에 대비한 심리관리를 실시하는 등 환자가 향후 성공적으로 일상에 복귀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집중 훈련을 실시한다.

18개월의 재활 기간 동안 모든 환자는 욕실이 포함된 1인실에 입원한다. 아니 '거주한다(wohnen)'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실제로 판 첸트룸은 환자들을 위한 거주 콘셉트(Wohnkonzept)를 개발했는데 이 부분이 흥미롭다.

판 첸트룸에는 총 5개의 거주단지(Wohnverbünde)가 조성되어 있다. 거주단지는 환자들의 연령과 재활 중점에 따라 ►40세 미만 환자 거주단지 ►40세 이상 환자 거주단지 ►방향감각상실 환자 거주단지 ►실어증 환자 거주단지 ►집중훈련 거주단지(퇴원 후 자립생활이 가능하도록 집중훈련을 실시하는 곳)로 구분된다.

판 첸트룸 본관을 중심으로 조성된 거주단지. ©P.A.N. Zentrum 판 첸트룸 본관을 중심으로 조성된 거주단지. ©P.A.N. Zentrum

판 첸트룸 재활 비용

판 첸트룸 환자는 18개월간 무료 재활을 받는다. 의료·치료적 차원의 재활 프로그램은 사회법전 제5권(건강보험에 관한 법)에 근거하고, 자립생활지원 차원의 재활 프로그램은 연방참여법에 근거하여 국가가 책임지고 지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활기간 동안 본인 부담금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물론 재활승인절차가 순탄하지만은 않다. 독일의 건강보험은 공보험과 사보험으로 나뉘는데, 문제는 공보험사가 2023년 기준으로 무려 96개나 된다는 것이다. 결국 환자가 가입된 공보험사의 혜택 범위에 따라 판 첸트룸 입원 여부가 결정된다. 게다가 실제로는 재활승인절차가 복잡해서(재활담당기구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재활신청 후 입원까지 최대 1년이나 걸리기도 한다.

휠체어 사용자가 직접 화초를 가꿀 수 있도록 설계된 미니 정원. ©P.A.N. Zentrum 휠체어 사용자가 직접 화초를 가꿀 수 있도록 설계된 미니 정원. ©P.A.N. Zentrum

우리가 독일 의료재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판 첸트룸 모델은 우리나라로 치면 회복기 재활 시스템에 속하기 때문에 독일 의료재활의 전반을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판 첸트룸 모델은 독일 의료재활의 다음과 같은 특징 및 가치를 적극 반영하여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재활은 참여이다. 독일에서 재활(Rehabilitation)은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강화하고, 완전하고 동등한 사회생활 참여를 도모하며,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모든 지원(사회법전 제9권 제1조)"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독일 의료재활은 단순한 의료·치료적 차원에서 벗어나 장애인의 일상생활 및 사회생활 참여를 강화하는 사회적 차원에 초점을 둠으로써, 재활은 곧 참여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둘째, 재활은 탄탄한 국가지원을 바탕으로 실시된다. 일반적으로 독일 의료재활은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연금보험, 연방노동공단, 사회부조, 그 외 다양한 경로를 통해 국가지원이 이루어진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 재활담당기구 및 보험사가 매우 다양하다 보니 재활 승인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 한계이기는 하다.

셋째, 재활은 다학제 협력을 통해 실현된다. 독일 의료재활은 의사와 간호사, 물리치료사, 언어치료사, 작업치료사, 심리학자, 간병사, 사회복지사 간의 긴밀한 협력과 동등한 협력관계 속에서 실현된다. 물론 각 전문가들은 의사의 감독하에 협력하지만, 각 직업군의 권위와 고유영역이 보장되는 가운데 각자의 전문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협력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의사의 권위가 타 전문가를 압도하지 않고, 서로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이러한 협력 문화는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진 6: 장애인 재활에서 다학제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 ©unsplash 사진 6: 장애인 재활에서 다학제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 ©unsplash

1909년 독일 장애인재활의 선구자로 꼽히는 비잘스키(Konrad Biesalski, 1868~1930)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장애인재활은 앙상블과 같습니다. 제1플루트를 불고 제1바이올린을 켜고 큰 북을 치는 사람은 모두 거장이지만, 이들은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아닙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바로 장애인입니다. 모든 악기는 지휘자를 통해 조화롭게 소리를 내야 합니다.

비잘스키의 목소리는 114년이 지난 지금도 울림이 강하다. 재활의 중심에는 장애인이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장애인을 통해 모든 전문가가 조화롭게 협력해야 한다. 이것은 장애인재활에 있어 불변의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