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loaded_6a7a75ffb8bd2.jpg "마이크는 켜졌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석미

【에이블뉴스 하석미 칼럼니스트】 한 달에 두세 번씩 방송국으로 향했던 시간라디오를 듣는 사람에게는 몇 분간 흘러나오는 여행 이야기지만그 몇 분을 만들기 위해서는 짧게는 3~4취재지가 먼 지역이라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소개해 온 여행지는 단순히 유명하거나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다. ‘장애인이 실제로 갈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12년의 시간몇 분의 방송 뒤에 있었던 것

여행지를 정하는 순간부터 취재가 시작됐다휠체어로 이동할 수 있는지경사로와 엘리베이터는 있는지있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운영되는지장애인 화장실은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인터넷에 장애인 이용 가능이라고 적혀 있다고 해서 그대로 믿을 수도 없었다막상 가보면 출입구에 턱이 있거나 엘리베이터가 운행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장애인 화장실 문이 잠겨 있거나 없는 곳도 있었다.

그럴 때면 관리자를 찾아 문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다개선이 필요한 시설에는 민원을 제기하기도 했다이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다시 확인해 방송에 담았다.

내가 직접 가보고 이용할 수 있어야 다른 휠체어 이용자에게도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현장을 확인하고사진과 정보를 정리하고다시 원고를 썼다.

그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내가 먼저 다녀온 경험이 누군가에게 나도 갈 수 있겠다는 용기가 되고실제 여행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이 방송을 계속하는 이유를 찾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방송했다그런데 방송을 내려놓으며 한 가지 질문이 남았다장애인의 목소리는 필요하다고 말하면서그 목소리를 만들어 내는 장애인 당사자의 시간과 경험도 우리는 같은 무게로 존중하고 있을까.

방송국에 가는 것부터 다른 장애인 출연자의 현실

장애인 출연자에게 방송국에 가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출근일 수 있지만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휠체어 사용인은 이동지원 차량을 예약해야 해고배차 시간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준비해야 하고휠체어로 이동할 수 있는 동선도 생각해야 한다폭염이나 폭설처럼 날씨가 극단적인 날이면 그 부담은 훨씬 커진다.

그렇다고 생방송의 원칙을 가볍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나는 12년 동안 가능한 한 방송국에 직접 가서 생방송에 참여했다사정이 있을 때는 제작진과 협의해 전화 연결이나 사전녹음을 이용하기도 했다.

올해 5월부터 8월까지 개인 일정과 여러 상황 때문에 생방송과 사전녹음을 병행했고그 기간 사전녹음은 모두 세 차례였다어떤 달에는 두 번 모두 생방송에 참여했다.

그러던 어느 날생방송과 녹음을 모두 마친 뒤 담당 PD에게 왜 요즘 계속 녹음을 하느냐는 말을 들었다. “그전에는 안 바빴느냐”, “녹음하면 얼마나 힘든 줄 아느냐는 말이 이어졌고, “바쁘면 그만둬도 된다는 취지의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당황했다내가 왜 녹음을 해야 했는지 먼저 묻는 대화는 없었다앞으로 생방송 참여가 어렵다면 전화 연결 등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이야기도 없었다세 차례의 사전녹음이 어느 순간 계속 녹음하는 출연자의 문제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그래서 물었다녹음을 해야 한다면 방송을 계속하기 어려운 것이냐고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방송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누구의 사정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원칙

그런데 그날 뜻밖의 문자를 하나 받았다내가 마지막 녹음을 하고 있는 사이 제작진이 보낸 메시지였다다음달 담당 PD의 일정 때문에 방송분을 미리 녹음해야 하니 생방송을 하러 오는 날 사전녹음도 함께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그 문자를 한참 바라봤다화가 났다기보다 이상했다.

출연자의 사정으로 필요한 녹음은 제작진에게 부담이 되는데제작진의 사정으로 필요한 녹음은 자연스럽게 출연자에게 협조를 요청할 수 있는 일이 되는 것일까.

사전녹음을 언제든 허용해 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방송에는 제작 일정이 있고 생방송을 원칙으로 운영할 수도 있다오랫동안 출연해 온 나 역시 그 원칙을 존중했다내가 묻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다규정이나 원칙보다 먼저 사람의 상황을 물어볼 수는 없었을까?

요즘 무슨 사정이 있으세요?”

생방송 참여가 어려우면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그 짧은 대화가 먼저 있었다면 어땠을까장애 감수성이나 배려는 반드시 거창한 제도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이동은 괜찮으셨어요?”

날씨가 너무 더운데 전화로 연결하는 것이 나을까요?”

생방송이 어려우면 어떤 방법으로 조정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상대의 상황을 먼저 묻는 말 한마디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특히 장애인의 삶과 권리사회참여를 이야기하는 방송이라면 더욱 그렇다.

장애 특성 때문에 말이 조금 느릴 수도 있다방송 도중 기침이 나올 수도 있고한 문장을 말하는 데 다른 사람보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수도 있다방송국에 도착하기까지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한 사람도 있다.

그것은 방송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결함이 아니다그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의 일부다장애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방송이라면 그 현실을 비장애인의 기준에 맞춰 지우려고 하기보다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장애인의 이야기를 담는 방송에서함께 만드는 방송으로

12년 동안 여행지를 취재하면서 쌓은 정보는 인터넷 검색만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전동휠체어를 타고 직접 길을 지나며 경사를 느꼈고출입구의 턱을 확인했다엘리베이터에 직접 들어가 보고 장애인 화장실도 실제로 이용해 봤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이 쌓이면서 어떤 정보가 휠체어 이용자에게 정말 필요한지도 알게 됐다나는 그것을 단순한 경험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현장을 다니며 축적한 지식이고장애인 당사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던 전문성이다.

방송에서 출연자가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이 들여온 시간과 노력장애인 당사자로서 쌓아 온 경험까지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그래서 이번 일을 개인적인 서운함으로만 남기고 싶지는 않다누가 출연하든 장애인 당사자를 단순한 출연자가 아니라자신의 경험과 전문성을 가진 방송의 한 주체로 존중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장애인의 이야기를 방송하는 것과 존중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프로그램에 장애인을 출연시키는 것과 장애인 당사자를 방송을 함께 만들어 가는 주체로 인정하는 것도 다르다장애인을 위한 방송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그 방송이 장애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장애 특성과 삶의 조건을 얼마나 이해하려 하는지함께 일하는 장애인 당사자를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도 중요하다.

장애인의 이야기를 가져와 담는 방송을 넘어장애인의 경험과 전문성을 존중하며 함께 만드는 방송공영방송의 장애인 프로그램이라면 그 차이를 누구보다 먼저 보여줄 수 있었으면 한다.

12년 동안 함께했던 마이크를 내려놓으며 바라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다음에 그 자리에 앉게 될 또 다른 장애인 출연자에게는 먼저 사정을 묻고함께 방법을 찾고한 사람의 경험과 시간을 존중해 주는 방송이었으면 한다.

결국 장애 감수성은 장애인을 이야기하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